하늘나라의 멍에(The Yoke of the Kingdom)

여러분은 혹시 소로 쟁기를 끌어 밭을 갈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이 같은 고대 농경 방식을 많이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쟁기의 날을 고랑에 똑바로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내 소의 멍에와 쟁기 사이의 사슬을 자연스럽게 잡아당기고 가끔 필요할 때만 조정하면서 쟁기 날을 똑바로 끄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힘이 센 동물인 소를 이용해 일하는 것이지요.

 

멍에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왕권의 멍에를 메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멍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는 멍에가 무엇인지, 멍에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기계 시대에는 많은 농부들이 멍에를 씌운 동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멍에(yoke)’라는 영어 단어는 명사 혹은 동사로 사용됩니다. 명사로서의 ‘멍에’는 목재나 철제로 만들어진 가로 막대로, 두 동물의 목이나 어깨에 씌워 동시에 당길 수 있도록 하는 기구를 의미합니다. 멍에와 관련하여 ‘겨리’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멍에로 연결된 한 쌍을 칭합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에서 21절에는 엘리사가 열두 겨릿 소로 밭을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그가 한 겨릿 소를 가져다가 잡고 나무 멍에로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동사의 형태로 ‘멍에를 씌우다’는 두 동물을 함께 연결한다는 뜻입니다.

 

농업에서도 그리고 성경에서도, 무언가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멍에를 씌운다는 개념은 종종 부정적이거나 부담스러운 것으로 비춰집니다. 일례로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계명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축복과 저주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48절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이것은 예레미야 27장과 2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적들로부터 직면하게 될 압제와 노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왕의 멍에”에 대해 다섯 번 경고합니다. 또 멍에는 이스라엘 왕으로 인해 그 민족이 지게 된 세금과 강제 노동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하 10장 11절을 보면 새로운 왕 르호보암이 젊고 자신만만한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열두 지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솔로몬)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역대하 10:11a) 이후 나라가 영원히 분열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지요.

 

하늘나라의 멍에

 

그러나 멍에를 지는 개념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유대 전통에서 “왕국의 멍에를 진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길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된 사람을 칭할 때 사용됩니다. 루이스 아이작 라비노비츠(Louis Isaac Rabinowitz)는 유대 백과사전(Encyclopedia Judaica)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사람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 ‘사람의 왕국의 멍에’는 ‘하늘의 왕국의 멍에’와 대조를 이룬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멍에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초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말씀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1+1=4의 공식입니다.

 

두 동물이 함께 끌면 일을 분담시킬 수 있습니다. 두 마리가 한꺼번에 끌면 각각의 동물이 개별적으로 끌어서 얻는 힘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마리의 말은 8,000파운드(약 3,600kg)까지 끌 수 있습니다. 정말 힘이 세지요. 그럼 두 마리의 말을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마리가 8,000파운드를 끌 수 있다면 두 마리는 16,000파운드를 끌 수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두 마리의 말을 함께 끌면 한 마리가 끄는 무게의 두 배가 아니라 세 배까지 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8,000파운드를 끌 수 있는 말 두 마리를 연결하여 함께 끌게 되면 24,000파운드를 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만약 함께 연결된 두 마리의 말이 서로 잘 적응하여 훈련되었고 전에도 함께 일을 했다면, 이 두 마리를 함께 끌 때 한 마리로 끄는 무게의 세 배만 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마리의 잘 훈련된 말이 협력하여 동시에 끌 경우에는 실제로 32,000파운드까지 끌 수 있으며, 이는 한 마리의 말이 홀로 끄는 무게의 4배에 해당합니다.

 

저는 직접 경험을 통해 멍에를 메고 함께 일하는 동물들의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멍에를 메어온 숙련된 동물들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은 협력하여 조화롭게 일하고 그들이 받은 명령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드럽고 효율적으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물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험이 없는 어린 소를 숙련되고 나이 많은 소와 함께 멍에를 씌워 어린 소가 배우도록 만듭니다. 아직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동물들을 데리고 일을 하면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약하고 어린 동물을 힘세고 나이든 동물과 함께 멍에를 씌우면 종종 어린 쪽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 들거나 고랑의 끝에서 멈추기를 거부합니다. 훈련이 될 때까지는 다소 불편하고 힘이 들지만 이것이 어린 동물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길을 걷기로 선택함으로써 기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멍에’를 멜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애쓸 때보다 삶이 더 수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마음으로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로 걷는 법을 더 오래 연습할수록 우리는 주님과 함께 전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예레미야애가 3:27)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명이나 수고나 고난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멍에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젊은 시절에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나중에 그 사람을 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훈련과 어려움이 거의 환영받지 못하지만, 지나고 보면 우리를 더 나아지게 만들어 준 인생 초기의 그러한 경험들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말씀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훈련을 받는 어린 동물처럼 우리 역시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멍에로 인해 살갗이 쓸릴 수도 있지만, 마침내 우리의 삶 속에 의의 열매가 맺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유대 전통

 

하나님의 왕국 혹은 하늘나라는 유대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며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개념입니다. 이에 대한 더 깊은 논의와 묵상은 Bridges for Peace 티칭레터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대교에서 매일 드리는 공동 기도에는 하늘나라의 멍에를 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모셰 바인펠트(Moshe Weinfeld)는 그의 저서 《제 2성전 시대의 규범적, 종파적 유대교(Normative and Sectarian Judaism in the Second Temple Period)》에서 하늘의 멍에를 메는 것과 쉐마의 개념을 연결지어 설명했습니다. ‘쉐마(Shema)’는 ‘듣는다’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는 것을 넘어서서 행할 의지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쉐마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으로 신명기 6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오직 유일한 신이시라는 진리를 듣고 이해하며 그분의 길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바인펠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충성의 맹세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쉐마의 고백에서 믿는 자는 만유의 왕께 충성하기로 서약하는 것이다.” 왕을 따르는 사람들 없이는 왕국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왕의 규칙과 가치를 지키는 백성이 필요합니다. 독실한 유대인은 매일 쉐마를 낭독하면서 먼저 왕이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다음으로 그분의 계명을 따르기로 서약합니다. 왕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 것이므로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중에서도 가장 긴 시편이며 17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9:1-2)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편 119:33-35)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시편 119:97-99)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 119:174-176)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편 전체에 걸쳐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와 축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선한 명령을 주시는 그분께 대하여 우리 자신이 멍에(충성의 언약)를 메려고 하지 않는 걸까요?

 

오늘날의 교회

 

여호와의 ‘율법(가르침)’을 선하고 유의미하고 축복으로 보는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구약(히브리 성경)’은 폐지되었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가르침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바꾸셨을까요? 그분의 선하신 가르침을 버리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말라기 3장 6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랍비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계명의 멍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멍에를 이해하고 살아내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받은 선한 가르침의 멍에를 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선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1세기에 기록된 초기 크리스천 문헌인 ‘디다케(Didache)’에도 ‘주님의 멍에’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디다케는 ‘열 두 사도의 가르침(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디다케는 영어 단어 ‘didactic(교훈적인)’과 동일한 헬라어 어원에서 유래된 만큼 도덕적인 교훈들을 담고 있으며 그 당시 많은 이방인 새 신자들을 위한 지도서로 여겨졌습니다. 디다케 6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멍에를 전부 질 수 있다면 온전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기 원한다면” (마태복음 5:48) ‘주님의 멍에’를 최대한 많이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위한 선한 가르침이며 이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지는 것은 곧 제자도이며 믿는 자의 인생에서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그 당시 믿는 자들이 가진 성경은 타나크(Tanakh, 창세기-말라기)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19절에 예수님 역시 이와 같이 확증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5:17-19) 그러므로 목표는 여호와의 계명(명령)을 전부 지키는 것이며, 디다케의 저자는 믿는 자들이 그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시편 119장 1절과 34절에서 35절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편 119:1, 34b-35)

 

이처럼 멍에라는 용어가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 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이를 정확하게 적용시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약 200년 전에 쓰여진 아포크리파(Apocrypha, 외경)에도 우리가 참고할 만한 또 다른 내용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지혜를 찾는 일의 가치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잠언 2장에서 4장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배우지 못한 자여, 내게로 가까이 오라. 학문의 집에 거하라. 어찌하여 너는 느린가? 너는 이러한 것에 대해 무어라 말할 것인가? 너의 영혼은 갈급한가? 내 입을 열어 말하노니, 너를 위하여 지혜를 사되 값없이 사라. 네 목을 지혜의 멍에 아래 두고 네 영혼이 가르침을 받게 하라. 지혜는 가까이에서 찾으리라. 네 눈으로 보아라, 적은 노동으로 많이 쉬리니” (Ben Sira 51:23-27) 여기서 우리는 가르침과 지혜, 즉 주님의 멍에와 안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1+1=4의 원리가 다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는 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분의 영광스러운 제안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리고 10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크고 거룩한 도우심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삶 속에서 수 많은 어려운 시험들을 통해 이 진리를 배웠고 빌립보 교회에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글을 맺으며

 

오늘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을 유일하고 참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왕국의 멍에, 계명의 멍에를 지라는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선하신 가르침이자, 우리를 지으신 분의 매뉴얼입니다. 그분의 제안은 그분과 함께 제자도의 멍에를 지고 의로 연단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가 아닌 성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며 세상에 영광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멍에를 메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테리 메이슨 목사(Rev. Terry Mason)

Bridges for Peace 국제개발부 담당이사

Bibliography

“Didactic.” Dictionary.com. https://www.dictionary.com/browse/didactic
“Encyclopedia Judaica: Yoke.” Jewish Virtual Library. 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yoke
Janicki, Toby. The Way of Life: The Rediscovered Teachings of the Twelve Jewish Apostles to the Gentiles.
Jerusalem: Vine of Davi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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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vall, Jim. “Horse Sense.” Tim Maurer. https://timmaurer.com/2012/01/16/horse-sense/
Tverberg, Lois. “Jesus’ Yoke.” En-Gedi Resource Center. http://www.egrc.net/articles/Rock/Jesus’_Jewis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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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nfeld, Moshe. Normative and Sectarian Judaism in the Second Temple Period.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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