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

“When I consider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ordained;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You visit him?” Psalm 8:3-4 (Photo credit: Sergey Nivens/shutterstock.com)

저는 종종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던 저는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내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크게 <사람, 공의(정의),
시온>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마 모든 크리스천들이 외우고 있는 구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창조주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대자연을 만드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남편과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창조주를 기억하게 합니다. 제가 하나님과 가졌던 많은 감동적인 순간들 역시 그분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자연은 분명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성경 구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한 ‘세상’은 자연 세계나 물리적인 지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편 8:3-6)

하나님의 창조 과정 가운데 최고의 순간은 사람을 만드셨을 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을, 특히 그 세상 가운데 두신 사람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전부 사랑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특별히 그분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지목하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유대 민족) 그리고 예수님(예슈아)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유대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고 배웠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유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게 보여주셨고, 그들을 향한 그분의 깊은 사랑을 제 마음에 심어 주셨습니다.

(Photo credit: bridgesforpeace.com)

나중에 저는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오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예슈아)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가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유대인들은 종종 혼란스러워하며 제게 묻습니다. “왜 당신과 같은 어떤 크리스천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스라엘을 보이콧 하나요? 왜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나요? 두 크리스천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종교적인 크리스천들보다 유대인들을 사랑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대답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으로 보는 반면, 두 번째 부류는 자신들이 따르기를 원하는 성경 구절을 스스로 고르고 선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 대해 살펴봅시다.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맺으신 관계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신명기 7:6-7, 13)

선지자들 역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 (이사야 43:1,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예레미야 31:1-4a)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말라기 1:1-2)

“See, I have inscrib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Isaiah 49:16
(Photo credit: Sivano Donneri/shutterstock.com)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시편 47:4)

사도 바울은 비록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8-29)

부모는 첫 아이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이나 부모를 잘 따르는 자녀에게 넓은 마음을 갖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제 여동생에게 엄마와 아빠가 나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동생보다 더 오래 사랑받았고 더 많이 사랑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보다 내가 더 사랑받기 원하는 마음은 유치하고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새로 태어난 동생을 나보다 더 사랑할까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일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장자인 유대인들을 향해 더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억울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장자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사야 49:14-16)

예수님(예슈아)의 제자들

예수님(예슈아)의 제자인 우리 크리스천들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것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큰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요한복음 16:27)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며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5-16)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9-10)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As the Father loved Me, I also have loved you; abide in My love.” John 15:9
(Photo credit: Michio Nagata/bridgesforpeace.com)

우리가 사랑에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사랑하는 마음에 응답하십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시는 사랑은 단순히 따뜻한 감정과 친절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행함으로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명기 7: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잠언 15:9)

“…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시편 146:8)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7)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37:28)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33:5)

저는 사랑이 많은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썽을 피울 때도 부모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저의 행동과 상관없이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저의 행동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족으로 태어났고 가족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가족으로 태어난 자를 조건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완벽하게 행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분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He loves righteousness and justice;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Psalm 33:5
(Photo credit: Andrey_Popow/shutterstock.com)

태어나면서부터 저는 우리 가족의 행동 양식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규칙이 있었고 바람직한 행동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선택과 행동은 필연적으로 달갑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 역시 행동 수칙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가족 구성원들이 그분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길 기대하십니다.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그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풍요롭고 평안하며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길에 반하는 삶을 택하는 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초래하는 결과를 경험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이 공의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해 공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 백과사전(Encyclopedia Judaica)은 공의에 대해 “모든 법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모든 관계 가운데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실질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의로운 행동은 사회적 안정과 궁극적 평화를 가져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사야
32:17)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유대인 현자 엘리아자르 벤 샤무아(Eleazar Ben Shammua, AD 150)는 “세상은 ‘공의’라는 하나의 기둥 위에
놓여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의 그리고 정의라는 주제는 거대해서, 제가 다룰 수 있는 것은 표면적인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 티칭레터를 통해 그분의 마음을 우리 각 사람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공의를 사랑하실까요? 우리를 힘들게 하시기 위해서일까요? 앞서 언급한 유대인 현자
엘리아자르 벤 샤무아는 왜 “세상이 ‘공의’라는 하나의 기둥 위에 놓여 있다.”고 말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공의롭게 사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곳에는 증오도 없고, 살인도, 간음도, 탐욕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율법을 따른다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보다 이웃과 공동체와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공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이 티칭레터의 첫 번째 주제인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만일 인류가 그렇게 살아왔다면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쩨덱(tzedek, צדק)입니다. 이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말로
짜딕(tzadik, 공의로운)과 쩨다카(tzedakah, 자선)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진실로 공의로울 수 있을까요? 인간은 올바른 삶을
열망하지만 대개 자기 자신의 기대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전도서 7:20)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로 예수님(예슈아)을 세상에 보내어 죄 없으신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로마서 3:22).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의 의를 통해 믿는 자들을 바라보시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1-2)

앞서 인용한 유대 백과사전(Encyclopedia Judaica)에는 “절대적인 공의를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선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를 공의로 인도하는 성령의 선물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되는 권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도구를 받은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선택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선택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과 요한의 말씀을 몇 가지 살펴봅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3)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34)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에베소서 5:8-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에베소서 6:13-14)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2:29)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10)

위 구절들은 우리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 공의롭게 살기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 죄(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공의에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정의는 법률적 개념 중 하나입니다. 잘못된 일이 발생하면 누군가가 재판에 회부됩니다. 또 필요한 사람에게
정의를 적용시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습니다. 불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항상 옳은 일을 선택한다면 법정도, 변호사도, 재판관도, 처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볼 것이기 때문에 가난도 없을 것입니다. 정욕이 억제되기 때문에 성매매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바로잡기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The LORD loves the gates of Zion… ” Psalm 87:2
(Photo credit: Michio Nagtata/bridgesforpeace.com)

앞서 언급했듯이, 히브리어에서 자선과 공의는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대적 사고에서 자선(tzedakah, 쩨다카)은 공의로운 자(tzadik, 짜딕)가 되기를 원하는 이에게 필수적인 개념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성경 및 유대적 사고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하나님은 시온을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편 87:2), “…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시편 78:6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명기 11:11-12)

우리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합시다

(Photo credit: halfpoint/shutterstock.com)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저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이제 결론을 내려 봅시다. 우리는 사람들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전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을 사랑하되,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내용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요?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스라엘로 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땅과 성읍을 직접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십시오. 이상적인 모습의 공의와 정의를 생각하며 모든 면에서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먹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7-18)

레베카 브리머 목사(Rev. Rebecca J. Brimmer)
Bridges for Peace 국제 회장 겸 CEO

Bibliography

Baron, Joseph L., ed. A Treasury of Jewish Quotations. Maryland: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1985.

Birnbaum, Philip. Encyclopedia of Jewish Concepts. New York: Hebrew Publishing Company, 1993.

Skolnik, Fred, ed. Encyclopedia Judaica. Farmington Hills: Gale, 2007.

Tenny, Merrill C., ed. 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Grand Rapids: Regency Reference Library,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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