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 (The Approval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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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의로운 행동과 경건한 태도와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노력합니다. 또한 그분의 영광 안에서 아름다운 건물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신앙의 리더들은 유창한 메시지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완벽해지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사야 66:1-2)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서 말씀에서 인류에게 유일한 현실 공간인 지구는 하나님의 초라한 발판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발판 위에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에 우리는 얼마나 작게 보일까요? 하나님께 있어 인간은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미세한 존재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집을 지어드리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만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을 때로는 성전에, 때로는 우리의 생각속에 가두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 대로 행하시도록 그분을 제어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하고, 그분을 우리의 생각과 신학과 이기적인 욕망의 ‘상자’ 안에 담으려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바로 이 하나님, 위대하신 만유의 창조주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이사야서 66장에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사람의 세 가지 특성이 나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가 곧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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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우리가 구하기 좋아하지 않는 성품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저를 낮추소서.”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우리는 자존심으로 가득 차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원치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겸손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낮아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거룩하신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가져야 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성경은 모세가 가진 가장 훌륭한 성품이 겸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수기 12:3).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겸손한 성품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겸손하게 아뢰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세기 18:27)

야곱은 그의 형 에서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겸손히 간구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창세기 32:10)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기꺼이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다윗의 아내는 그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다윗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사무엘하 6:22)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5)

크리스천인 우리는 예슈아(예수님)께서 그분의 삶을 통해 친히 보여주신 겸손을 보며 놀랍니다. 그분은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며,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유대교에서는 겸손을 인간의 윤리 수준 중 가장 높은 가치로 여깁니다. 많은 유대교 랍비들과 현자들이 겸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탈무드(Talmud,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랍비의 주석서)는 최고의 표현들로 겸손의 미덕을 극찬했습니다. 2세기 당시의 랍비 메이어(Rabbi Meir)는 겸손에 대한 참된 시험은 천박하고 무례한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Avot 4:12). 랍비 하니나 b. 아이다(Rabbi Chanina b. Ida)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만이 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말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결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 결과 진리는 늘 그를 비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랍비 힐렐(Rabbi Hillel)의 여러 성품 가운데서 온유함을 가장 귀한 자질로 평가했습니다(Shabbat 31b).

유대 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그의 저서 『미쉬네 토라(Mishneh Torah)』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경이로운 일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비길 데없이 완전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 인간은 다윗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지체 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작고 천하고 희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아시는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Yesod haTorah 2:2)

랍비 야브네의 레비타스(Rabbi Levitas of Jabneh)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결국 벌레에게 먹힐 뿐임을 생각했을 때 자존심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Avot 4:4) 다른 유대 학자들 역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높임을 받고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는 위대함을 찾는 사람에게는 위대함이 비껴가지만, 위대함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는 위대함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Eruvin 13b)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자는 언제나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와 만나셨을 때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출애굽기 3:6).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에 둘러싸여 “화로다”라고 외쳤습니다(이사야 6:5). 에스겔은 고개를 숙였습니다(에스겔 1:28). 바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사도행전 9:4). 사도 요한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1:17).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의 광경에서 우리는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4:10).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할 때면 제사장들은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습니다(역대하 5:14).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때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십니다(이사야 57:15).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합니다(시편 37:11).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돌보십니다(이사야 66:2).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야고보 4:6).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며(베드로전서5:6, 누가복음 18:14)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이사야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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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가난한 자에게는 가장 큰 상급이 주어집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위대함이 비껴가지만 가난한 심령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에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은 높은 지위에 이르러 인정을 받고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해 일평생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 4:10)

심령에 통회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우리는 완전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혹과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하도록 만드신 걸까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완벽이라는 잣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완벽하게 성공한자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통회하는 심령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은 죄와 실패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합니까? 이를 무시하고 계속 잘못된 길로 행합니까? 아니면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까?

‘통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다카(dakka, דכא )’는 ‘상하게 하다’ 혹은 ‘짓밟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받고 불구가 되고 실의에 빠지고 절뚝거리고 깊이 뉘우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현대 히브리어 용례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불구가 된 사람을 일컫습니다. 웹스터 사전(Webster’s dictionary)은 통회에 대해 ‘죄 혹은 잘못된 행위로 인해 깊은 고통의 감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자를 돌아보신다고 하신 것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행위에 대해 깊은 슬픔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단순한 인지 혹은 인정을 넘어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 것이며 회개(죄에서 돌이켜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크리스천 신학자들은 두려움으로 하는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을 고치려는 회개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변화시킬 필요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해 슬픔을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51편에서 다윗 왕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른 남자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여 그녀와 동침하고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죽임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동에 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3장 22절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는 심령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나단에 의해 자신의 죄와 직면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편 51:1-2)

그렇습니다. 다윗은 큰 죄를 짓고 하나님을 슬프게 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더 큰 죄에 사로잡혀 우리의 인생이 수렁에 빠지기 전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 깨닫게 하신 것에 주의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언젠가 우리의 죄악과 마주해야 합니다.

회개와 용서는 크리스천과 유대인 모두에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랍비 엘리에젤 벤 히르카누스(Rabbi Eliezer ben Hyrcanus)는 제자들에게 죽기 하루 전에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자 랍비 엘리에젤은 그렇기 때문에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Shabbat 153a).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의 유대인 교수 스티븐 카츠(Stephen Katz)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용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반드시 자신을 비천하게 여겨야 하며 잘못을 깨닫고 죄에서 떠나기로 결심해야 한다. 내면의 회개에는 외적인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후회는 행위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단계, 즉 악을 중단하는 거부의 단계와 선을 행하는 긍정의 단계가 포함된다”(Katz 111).

유대 현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회개하면 그의 악행을 속히 용서하시지만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먼저 사람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BT Rosh HaShanan 17b).

예슈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마음에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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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창세기-말라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4번에 걸쳐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의 깊은 내면까지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외적인 행함은 반드시 그러한 진실을 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종교적인 사람들은 순전하고 의로운 마음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도 외식함으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명기 30:6)

일부 바리새인들에 대해 예슈아께서 비판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선하고 의롭게 비춰졌으며 겉보기에는 정결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비판의 말씀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과 동기를 살피고 우리의 순전함을 확인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23절에서 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말씀했습니다.

다행히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인간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거룩한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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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을 읽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말씀에 주의하며 사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저는 구소련 당시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단 한장의 성경만 가지고 있었고 목사님은 수 년 동안 그 한 장의 말씀으로 설교했습니다. 성도들은 단 한 장의 말씀만 가지고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갔지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더 많이 알고자 갈망했습니다. 이후 마침내 성경 한 권 전체를 받게 된 목사님은 기쁨에 가득 차 울었다고 합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저희 집에는 다양한 번역의 성경과 참고자료와 주석과 성서 용어 색인과 성경 사전 등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앞서 말한 구소련 목사님과 동일한 경외감이 없었습니다. 부끄럽고 슬픈 일이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앞에 떨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서 66장 2절에서 ‘떠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하레드(chared,חרד)’ 입니다. 이는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떨리는, 경건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토록 귀한 진리와 언약과 축복이 담긴 성경을 가볍게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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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에서는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성경이나 거룩한 책을 결코 폐기하지 않습니다. 그 책들은 게니자(genizah)라고 불리는 시나고그 내부 벽 안쪽 창고에 보관됩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진 것은 결코 폐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많은 고대 문서들은 게니자에 숨겨진 후 수세기를 지나 발견된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심카 토라(Simchat Torah, 하나님의 말씀의 기쁨) 절기는 유대인들이 일 년 동안 매일 정해진 토라의 말씀을 읽는 주기를 마치는 날입니다. 이날 유대인들은 토라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를 끝내고 다시 첫 책인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매년 이 절기가 되면 시나고그에서는 회중이 토라 두루마리를 들고 춤을 추고 때로는 거리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경외하는 축제를 엽니다. 또 그들은 새로운 토라 두루마리를 받을 때에도 이와 같이 기쁨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읽는 말씀에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이 기록된 책에 대해 우리가 단순히 존중하는 것 이상으로 귀하게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 앞에 두려움으로 떨어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바꾸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만유의 창조주이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손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 2:11)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종교적 관습이나 개인적인 경건함 혹은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사람을 주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며 심령에 통회하는 자 –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속히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며,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며 내면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꺼이 자기 자신을 그분 앞에 내어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위대하고 거룩하신 만유의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내고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 앞에 내어드릴 때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준비가 되셨습니까?

레베카 J. 브리머(Rebecca J. Brimmer)

Bridges for Peace 국제회장 겸 CEO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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