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성 (Cities of Refuge)

Joshua established six cities of refuge, three on the east side of the Jordan and three on the west. Photo: vecteezy.com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와 타나크(Tanakh, 구약)에는 히브리 백성에게 주어진 혁신적인 법률과 사법 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을 비롯해 앗수르와 바벨론 법이나 윤리 규범과 비교하여, 토라는 당시 다른 어떤 법보다도 인간의 생명과 삶에 최우선 순위를 둔 사법 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의를 이루기 위한 언약이었으며, 그러므로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여느 사법 제도와 마찬가지로, 토라 역시 폭력 범죄와 살인 사건에 대한 처벌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토라는 피 흘림에 대해 친족 중 가장 가까운 남자가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가 되어 피 흘림을 속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살인자에 대한 보복은 피의 보복자의 권리이자 의무였으며, 이는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명기 19: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장 엄격한 보복 규정에서도 당시 이스라엘 및 주변 국가들에 만연했던 피의 불화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우연히 사람을 살해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피의 보복자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도록 ‘도피성(Cities of Refuge)’을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도피성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연한 사고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된 자를 보호하고 그를 보복하려는 자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의도치 않게 이웃을 해친 자

The six cities of refuge mentioned in Joshua. Photo: Richardprins/wikimedia.org

성경에서 도피성에 대한 내용은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레위 지파에게 주신 마흔 두 개의 성읍에 더해 여섯 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마련하라고 말씀하십니다(민수기 35:6). 이 여섯 성읍은 우연히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이후 토라는 이에 해당하는 사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혀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신명기 19:5)

다시 말해, 우연에 의한 살인은 계획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부주의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피 흘림이 일어난 모든 비극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창세기 9:6, 레위기 24:17) 도피성 제도는 우연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보복 법의 가혹한 적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살인자가 여섯 성읍 중 하나로 피신할 경우, 그는 피의 보복자의 진노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에 대한 규범은 민수기와 신명기에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0장에서도 마침내 히브리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 번 도피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에 셋, 서편에 셋, 총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세웠습니다. 도피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균등하게 배치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갈릴리 지역에 케데쉬(Kedesh) 성읍이,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에서 32킬로미터 아래로 헤브론(Hebron) 성읍이 세워졌습니다 (여호수아 20:7-8).

도피성이 세워진 여섯 지역에는 여섯 지파가 있었습니다. 케데쉬(Kedesh)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땅에 위치했고, 세겜(Shechem)은 에브라임에, 헤브론(Hebron)은 유다 산지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으로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과 도피성이 세워진 땅은 전부 레위 지파의 분깃에 해당했습니다.

감옥인가, 안전한 천국인가?

도피성이라는 말은 매우 자비롭게 들리지만 사실 이곳은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살인자는 계획적이거나 악의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에만 도피성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으로 간 살인자가 성문 어귀에서 자신의 사건에 대해 고하면 성읍의 장로들이 이를 듣고 그를 심판했습니다. 만일 그에게 분명한 죄가 있다고 판결이 날 경우,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피의 보복자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피성은 적법한 절차가 이루어질 수 있는 권한을 보호하고 회중이 사건의 내용에 대해 듣기 전에 살인자가 보복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도피성은 몸값 혹은 보석금을 허용하지 않는 감옥이기도 했습니다. 살인자는 남은 여생을 전부 도피성 안에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우발적 살인에 대한 공소 시효는 대제사장이 사망한 후에 만료되며 살인자는 그 이후에야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피성 내에서의 삶은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고 보복을 피하는 것 외에도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피성을 관리하는 레위인들은 우발적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건전한 학습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만일 가해자가 도피성을 나와 세상으로 돌아올 경우, 그는 전보다 더 나은 시민이 되고 전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이러한 생활 방식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 “가해자는 더 현명해지고 더 성숙해질 수 있었으며, 자신의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고 더 나은 세상에서 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탈 동안

도피성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갑작스런 죽음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는 명백한 자비의 확장인 반면, 피의 보복자에게는 그리 자비롭지 않은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19장 6절에 “두렵건데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도피성이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중에게 사건의 내용이 알려져 합법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 슬픔과 분노에 찬 피해자의 친족이 가해자를 향한 보복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피의 보복은 단순히 허용된 것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찰스 리 파인버그(Charles Lee Feinberg)는 《도피성(The Cities of Refuge)》이라는 제목의글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히브리적 사고는 창세기에 묘사된 피의 보복,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면 그 사람도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세기 9:6)는 구절을 뒷받침해 준다.”고 기록했습니다. 파인버그는 또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에 대한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피의 보복은 단순히 명예의 문제를 넘어 종교적인 의무가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의 보복자의 마음이 가장 가까운 친족의 우발적인 죽음에 대해 분노로 가득 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가해자를 죽일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피성은 자비로운 해결책을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친족들에게 더 이상의 유혈 사태 없이 불화를 사라지게 하는 합법적이고 명예롭고 거룩한 방법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제도

도피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정의 구현 과정은 단순히 피의 보복자와 가해자 간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민수기 35장 24절에는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라고 기록되어 있고, 25절에는 “회중이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회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비극적인 사건 이후 피의 보복자가 상황을 냉철하게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긴박한 상황에 개입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살인 사건의 진실을 가려내는 데 있어 현명한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도피성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길 위에 서서 피고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회중을 구성할까요? 여호수아 20장 4절에는 가해자가 들어가고자 하는 도피성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사건을 고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5장 24절에서 25절과 신명기 12장 19절에는 가해자가 속한 공동체와 그가 속한 도시의 장로들 역시 여기에 개입하여 가해자를 피의 보복자의 공격으로부터 도피성으로
안전하게 인도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The congregation stood in the way of injustice and protected the accused’s right to a fair hearing. Photo: Charles Foster/wikimedia.org

여기에는 지리학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섯 지파는 레위인에게 도피성과 그 땅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도피성으로 이르는 길을 닦도록 명령받았습니다.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신명기 19:3) 이것은 곧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보수하고 표시하여 피고가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의 문제

우리는 앞서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것은 가해자의 통제 너머에 있는, 완전히 사고로 일어난, 어떤 과실의 결과도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소가 과거에 사람을 들이받은 적이 있음에도 혹시 나중에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지 않았을 경우, 이후에 일어난 사건은 완전한 과실의 결과로 간주되어 소의 주인은 죽음으로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실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 무죄로 판정을 받는 또 다른 조건도 있습니다.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신명기 19:4)은 앞서 민수기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민수기 35:23)

가해자의 마음이나 의도에 따라 죄를 판단하는 이 같은 개념은 비단 토라(Torah)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고 말씀하심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라가(raca)’라는 단어는 아람어에서 나온 것으로 ‘머리가 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을 조롱하는 데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분노로 가득찬 살인적인 영은 비록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있고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 역시 이와 동일한 관점을 보여줍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3:15) 살인자가 그 마음의 의도와 순전함으로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그와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따라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동기도 점검해야 하며, 증오나 분노 혹은 조롱의 마음에서 나오는 반응들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에는 우리가 달려갈 수 있는 물리적인 도피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대적인 사법 제도 하에서 도피성이라는 장치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또 현대 사회에서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개인적인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만일 그가 보복을 할 경우에는 그 역시 살인자로 간주됩니다.

고대 당시에도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택하신 백성을 위해 친히 만드신 이례적인 제도였고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이 같은 제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도피성에 대한 개념을 되살려 불법 이민자를 보호하는 도시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는 성경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단순히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고 수용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Photo: mohamed1982eg/pixabay.com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고대 도피성 제도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도모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도피성, 즉 평화로 이르는 길을 순탄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서 바울은 신명기 32장 35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19) 바울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하면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권면합니다. 도피성에서 회중의 역할은 <‘눈에는 눈’이라는 정의>와 <사람들이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그분의 바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고대 당시 도피성으로 이르는 길이 막힘 없이 잘 닦여진 것처럼, 평화로 향하는 길을 순탄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아울러 ‘눈에는 눈’이라는 심판 체계는 보복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보복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재로드 맥케나(Jarrod McKenna)는 《눈에는 눈인가, 다른 뺨도 돌려대야 하는가?(Eye for an Eye or Turn the other Cheek?)》라는 글에서 예수님께서 폭력에는 한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불의 앞에 다른 뺨을 돌려대는 예수님에게서 소극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치유적 정의를 구체화시키는 평화를 실천하는 도발적인 행동인 것이다.”

저는 평화의 추구가 소극적이 아니라 도발적이라고 표현한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 치열한 전쟁과도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에 이 전쟁은 도피성으로 향하는 잘 닦여진 길과 같았기 때문에 살인자와 피의 보복자 모두를 계속해서 반복되는 유혈 사태로부터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사건의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눈에는 눈’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때로 서로 간에 불일치가 일어나더라도 양쪽 모두를 보호하는 해결책에 도달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아비가일 길버트(Abigail Gilbert)
Bridges for Peace 출판팀 스탭

Bibliography

Clarke, Adam. “Joshua.” Clark’s Commentary: Genesis-Esther. 80-81.

Feinberg, Charles Lee. “The Cities of Refuge.” Bibliotheca Sacra. 103, 1946: 411-17.

Tenney, Merrill. “Cities of Refuge.” The Zondervan Pictoral Encyclopdia of the Bible. Grand Rapids: The Zondervan Corporation, 1976. 869-871. Print.

Jarrod McKenna, “Which is it? Eye for an Eye or Turn the Other Cheek?” Patheos (blog), April 1, 2011, http://www.patheos.com/blogs/christianpiatt/2011/04/which-is-it-eye-for-an-eye-or-turn-the-other-cheek-banned-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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